2008년 01월 04일
아메리칸 갱스터[American gangster, 2007]

데이빗 핀쳐의 <조디악>과 토니 길로이의 <마이클 클레이튼>에서도 감지했지만, 당대 할리우드가 갖는 70년대에 대한 향수는 리들리 스콧의 <아메리칸 갱스터>에 오자 비로소 그 노골적인 취향을 드러낸다. 프랜시스 코폴라의 <대부 연작>은 백인이 써내려간 반쪽짜리 역사에 불과하다는 감독의 호방한 선언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작품은 70년대 할렘가를 호령했던 마약왕 ‘프랭크 루카스’의 흥망성쇠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프랭크 루카스가 ‘흑인’이라는 인종적 정체성은 그리 부각되지 않는다. 그는 동시대의 유명한 권투선수였던 무하마드 알리처럼 피부색에 정치색을 덧칠할 정도로 과격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던 범피 존슨에게 사사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마약시장의 작동원리를 체득한 시장주의적 인물이다.
영화는 범피 존슨의 격언으로부터 시작하는데, 포드주의가 가속화 되는 대량생산과 소비를 상징하는 한 전자제품 매장에서 유언과도 같은 말을 남긴다. 모든 것이 대형화되고 규모가 일종의 미덕으로 자리 잡고 있는 사회에서 그는 상인들의 자부심이 실추되었다고 개탄한다. 일종의 경제-도덕의 구질서를 상징하는 범피 존슨이 퇴장하자 프랭크 루카스는 본격적으로 새로운 경제-도덕의 질서를 재편해나간다. 시장이라는 치열한 경쟁에서 오는 피로감을 떨쳐버릴 수는 방법, 그것은 그 시장을 장악하면 되는 것이다. 순도 40% 미만의 마약들이 거리를 활개하고 있는 뉴욕의 뒷골목을 프랭크 루카스는 방콕에 진주하고 있는 파월군인을 통해 순도 100%의 마약을 밀수한다. 때는 1968년이었고 미국은 베트남과의 전쟁에서 의외의 전세에 당황하던 시기였다. 반전시위와 반정부운동은 가열찼고 일상의 정치화라는 구호가 수를 놓았던 시기였다.
성공을 향해 부상하는 프랭크 루카스의 이야기와 함께 등장하는 것이 리치 로버츠라는 형사다. 모두가 부패했고, 모두가 범죄자들의 뒷돈을 챙기는데 여념이 없었던 시절에 그의 문제는 그가 너무 청렴하다는 것이었다. 당대의 직업윤리에 적응하지 못했던 리치 로버츠는 아내에게도 신망을 잃어 아내는 그에게 이혼소송을 선언한다. 리치 로버츠는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는 70년대 형사들의 편집증을 공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문란한 사생활은 그를 어딘가 느슨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70년대 영화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안티 히어로의 정서가 그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당대의 형사물에나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리치 로버츠가 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혹은 이 인물을 통해 감독의 의도를 추측해보면 당대의 시각에서 70년대를 해석하는 수행자 정도가 될 듯이다.
이는 다시 말해 프랭크 루카스와 리치 로버츠의 대결에 감독이 별반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리들리 스콧은 오히려 자신이 바라보는 1970년대를 보여주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메리칸 갱스터>는 프랜시스 코폴라나 마틴 스콜세지 혹은 월리엄 프리드킨에 대한 감독의 결핍을 드러낸 작품일 것이다. 그러나 리들리 스콧은 앞서 언급된 감독으로부터 멀리 나가지는 못한다. 물론 이 사실이 그를 몰개성한 감독으로 낙인찍지는 못할 것이다. 문제는 <대부>, <비열한 거리>, <프렌치 커넥션> 이라는 작품이 뛰어넘기기 쉽지 않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한편, 타제품과 견주었을 때 월등한 순도를 자랑하는 프랭크 루카스의 상품은 ‘블루 매직’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을 장악한다. 100%의 순도와 절반의 가격이라는 매력적인 요소는 할렘의 뒷골목을 강타한다. 시실리계 마약조직의 거물인 카타노는 그에게 묻는다. 독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제 온갖 거물들이 그를 주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프랭크 루카스의 시장독점은 치명적인 허점이 있다. 동남아원산지-파월군인-프랭크 루카스라는 삼각체계는 베트남 전쟁이라는 호기를 만났기에 가능한 것이다. 반대로 미국이 베트남에서 패전하고 군인들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순간 영원할 것만 같았던 시장에서의 그의 승승장구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전쟁을 통해 이익을 챙기는 프랭크 루카스라는 인물은 한편으로 미국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비판적인 알레고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그러나 뛰어난 범죄영화들이 보여주듯 범죄를 저지르는 개인과 그 개인의 행위에 동기를 부여하는 사회적 맥락은 자본주의의 시스템과 긴밀하게 손을 잡고 있다. 이는 불가피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조폭영화'는 범죄를 사회와 유리된, 철저하게 사적인 행위로 규정한다. 이는 장르적 변종일 뿐만 아니라 창작자의 일천한 사회의식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역시 '정치적'이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나 완전히 파멸하는 프랭크 루카스를 보여주기 보다는 프랭크 루카스 같은 인물들에게 기생하는 경찰들을 처단함으로서 이 영화가 온전히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저지한다. 리치 로버츠와 프랭크 루카스가 손을 잡고 부패경찰을 처단하는 후반부는, 미국의 절망을 보여주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70년대의 걸작 헐리우드 영화들의 허무주의와는 궤를 달리한다.
혹자가 지적했듯이 이 영화를 제목과는 달리 ‘갱스터’ 장르로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는 <아메리칸 갱스터>가 허풍까지는 아니지만 약간 과장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내가 볼 때 오히려 이 영화는 약간 낙관적인 기운이 서려있는 <프렌치 커넥션>이나 <히트>에 가깝다. 이는 그만큼 감독이 인물의 성격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는 말이다. 원칙주의자인 프랭크 루카스와 청렴한 리치 로버츠는 같은 양태를 갖고 있는 다른 인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아메리칸 갱스터>의 70년대식에서 감독이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저 쿨함으로 허무주의를 제거해버린 21세기의 감수성일 것이다. 그렇다면 쿨함은 동시대에 시대정신으로 충분한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 쿨함은 ‘경이로운 70년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앞으로도 당대의 미국영화들은 70년대의 유산을 어떻게든 드러내려고 할 것이다. 취향을 통해, 해석을 통해, 그것과 대결하든, 혹은 참고하든지 어쨌든 그들은 영화를 통해 70년대를 불러낼 것이다. 이는 70년대와 21세기의 미국이 그만큼 닮아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 by | 2008/01/04 11:25 | kino | 트랙백(1) | 덧글(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