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대개 레이몬드 카버라는 작가를 무라카미 하루키를 경유해서 알게 된다. 하루키의 팬이라면 다들 인정하듯 그의 작품들이 장편보다는 단편이, 단편보다는 에세이가 더 좋다는 평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물론 하루키의 문체에 익숙한 분들이라면 단편과 에세이의 형식이라는 것이 그에게는 그리 또렷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란 어렵지 않다.
나는 개인적으로 단편을 잘 쓰는 작가들을 ‘문학적으로’ 신뢰하는 편인데 이는 내가 장편을 단숨에 읽어나갈 정도의 끈기가 없는 편이기도 하지만, 단편을 잘 쓰는 작가들의 경우 그들이 대개 삶에 대해 많은 말들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섬세한 독자라면 단편소설의 소재나 내용에 불과한 것들을 온갖 수사로 치장해 장편소설로 탈바꿈시키는 영악한 저자들의 존재와 마주하였을 때 그 당혹감을 잊기란 쉽지 않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한국문학의 위기의 핵심이란 삶에 대한 사이비현자들이 너무 많다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읽을 만한 단편이 손에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니. 독자들이 왜 일본의 재기발랄한 단편들에 매료되는지 창작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하여간 단편 잘 쓰기로 유명한 하루키가 존경을 넘어 자신의 문학적 만신전에 추대한 이가 바로 레이몬드 카버라는 작가다. 익히 알려져 있듯 그는 두 명의 '레이몬드'를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입을 빌려 애정을 고백한 적이 있다. 당연히 그 중 한 명은 앞서 얘기한 레이몬드 카버이며 나머지는 하드보일드 소설가인 레이몬드 챈들러다. 카버와 챈들러라니. 이거 어디 미국 시트콤에 나올 법한 이름 같기도 하다. 이국적이면서 발랄한 하루키의 소설과 카버와 챈들러는 정서적 친화성을 은연중에 공유하고 있다. 인물들 주위를 감돌고 있는 고독한 공기와 그 고독함을 자기의 것으로 이미 체화해버린 인물들의 자세. 그리고 삶이란 그저 사는 것뿐이라는 전언의 날렵함. 다소 쿨하게 보이지만 막상 자기 것으로 만들기에는 쉽지 않은 이 문학적 에토스는 하루키 문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맨 윗자리에 카버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도박 빚을 갚으려고 소설쓰기를 시작한 도스토예프스키나 의대등록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창작에 착수한 안톤 체홉처럼, 카버 역시 그놈의 술 때문에 단편쓰기를 시작했다. 어떤 인터뷰에서 그는 술이 아니었으면 자신은 문학과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을 거라는 고백을 한 적이 있는데, 막상 소설을 읽어보면 그의 이 말은 괜한 너스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의 단편은 깔끔하며 한 가지 이야기에 집중하며, 삶에 대한 해설을 늘어놓지 않는다. 그는 그저 삶의 어떤 계기를 툭 잘라내어 독자들에게 보여줄 뿐이다. 영화로 치면 그의 단편은 하나의 훌륭한 시퀀스들이다.
<대성당>은 많은 사람들의 그의 최고 걸작으로 인정하는 단편집이다. 예전에 하루키가 번역한 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작품들이 나온 적이 있어서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 중에는 예전에 읽은 작품들도 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대성당>의 전작품이 완역되어서 출간되었다. 역자는 김연수다. 전에도 그의 소설에 대해 쓴 적이 있지만 요즘 그에 대해 신뢰감이 늘어가고 있어서인지 그의 번역도 기대하고 있다(사놓고 지금 중간 정도 읽고 있지만 번역은 매끄럽다). 사실 나는 카버의 대표 소설집 세 권(<will you please be quiet, please?>,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 <cathedral>)을 학부 때 읽은 적이 있다. 원서를 읽었다고 혹시 대단하게 여길 분들이 있을지 모르는데, 카버의 문체는 고등학교 1학년 정도의 영어실력만 갖추고 있으면 읽어나가는데 어렵지 않다. 그는 정말 쉽게 쓰는 작가다. <where I'm calling from>, <a small, good thing> 이나 다른 단편집에 실려 있는 <elephant> 같은 단편은 원문으로 읽어도 정서의 세기가 달라지지 않는 필독의 카버단편이다.
단 한 명의 단편작가를 찾는다면 카버를 읽어라. 올 겨울, 카버를 당신들에게 권한다. 게다가 하루키의 카버가 아닌 김연수의 카버라니 입질이 슬슬 땡기지 않는가.


덧글
marlowe 2007/12/28 14:27 # 답글
기대되는군요. *___*
둥글게 2007/12/28 16:40 # 답글
오오오+_+ 김연수의 카버라니.정말 입질이 슬슬 오는군요 ㅎㅎ
<제발 조용이 좀 해요>를 굉장히 인상깊게 읽었는데 -
안그래도 살 책 있었는데, 오늘 당장 주문해야겠어요 :-)
wannacat 2007/12/28 19:29 # 답글
오랜만입니다-기억하지 못하실 것 같지만, 유령으로서의 삶을 카버가 깨게 해주는군요^^
카버의 단편은 그러니까 행간을 알려고 하면 재미가 없어지는 것에 특징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이죠-
Ginger 2007/12/28 20:52 # 답글
하루키 소설을 보면서 이름은 알았는데 작품은 본 적이 없네요. 단편이라면 부담없이 읽을 수도 있으니 좋을 것 같아요.
낭만여객 2007/12/28 21:49 # 답글
좋은 책 같네요 :D 구입목록에 올려놓겠습니다 ㅎ
나나 2007/12/29 02:40 # 답글
땡기는데, 금책하기로 했어요..;ㅁ; 그냥 가볍게 생각없이 살아볼려구요 >_</
Elliott 2007/12/29 09:51 # 답글
marlowe/ 그렇죠? 실망하지 않으실 거라니까요.둥글게/ 문학동네에서 그의 단편집 세 권이 다 번역출간했습니다. 다 읽어보세요.
wannacat/ 네, 오랜만이네요. 기억을 못할리가 있겠어요. 잘 지내시죠?
ginger/ 그게 단편의 매력이기도 하지요.
낭만여객/ 좋은 책입니다. 읽고 감상문 꼭 서주세요. ㅎ
나나/ ;; 그래도 카버를 읽지 않으면 후회하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후후.
James 2007/12/30 09:05 # 답글
정말 빨리 읽히더군요, 후후. 단편이라 그런지 더욱더.
Elliott 2007/12/31 15:43 # 답글
james/ 잘 지내시죠. 반갑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