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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그녀의 편지. 일기

편지는 힘이 세다. 무덤덤한 일상에 파문을 남기고 지독한 권태로움에 뒤통수를 후려칠만큼 편지의 위력은 매섭다. 죽음을 목전에 둔 누군가가 자신의 남루함을 위무해줄 수 있는 그 편지 한 통이 간절했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 한 켠을 울린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진심어린 편지를 자주 받을 수 있는 당신은 복되다. 전자 매체의 건조함 속에 편지라는 대상은 이제 점점 거들떠보지 않는 시대의 유물로 혹은 퇴색해가는 조야한 박제로 전락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가 인간이라는 이름에서 호빵 한 개의 그 미열이라도 기대한다면 편지라는 물건은 끊임없이 멸종의 위기를 지연시켜 나갈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당신은 그 자체로 경이롭고, 경의롭고, 또 경외롭다.


서론이 길었다. 그녀에게서 정말 오랜만에 편지를 받았다. 조그만 엽서에 자신이 한참 빠져있는 스탬프를 찍어서 편지지를 만들었다. 3년이 다되어가는 오래된 연인에게 편지를 받은 느낌이란 뭐랄까, 카프카식으로 말한다면 얼어버린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여전히 나에게 굳건하고 변치 않은 존재감으로 남아있다는 자의식을 환기시켜줬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며, 그럼에도 여전히 남루한 내 일상의 진창 속에 처박혀서 잔뜩 오그라져있는 나의 자화상과 대면해야 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녀는 그녀 특유의 투박하지만 간결한 문체로 내 속을 파고들었다. 그녀가 ‘우리는 달콤함에 게으른 것 같아’,라고 시작할 때 나는 아찔해졌지만,  ‘서로 조금씩 신경쓰자. 나아가자.’라고 맺음을 할 때 나는 뭔가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각별한 이에게 받는 편지란 모든 문장들이 주옥같이 느껴지는 법. 나는 반복적으로 그 문장들을 읽고 또 읽었다.


조만간 나는 답장을 할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이 글쓰기야 말로 가장 어렵고 험난한 글쓰기가 되겠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참 많이 뜸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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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복숭아 2007/09/12 00:00 # 답글

    군대 간 이웃 블로거에게 정기적으로 편지가 옵니다. 비록 그 편지는 휴가 나가면 무엇이 먹고 싶다는 글로 가득 차있지만, 덧글이나 메일로 오는 글과는 느낌이 확실히 다르더군요. 그러고보면 전 연인에게 편지를 써준 적은 몇번 있는데 답장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저 또한 달콤함에 게으른, 아니 일방적 통행의 연애를 했는지도 모르겠네요. 책 읽기 좋고 글 쓰기도 좋은 가을인데, 저도 편지나 써봐야겠습니다.
  • daydream 2007/09/12 00:08 # 답글

    때때로 자주 얼굴을 보는 친구들에게도 손편지를 쓰곤 해요 :) 말로 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도, 손으로 옮겨 적어 건넬 때, 상대방 얼굴에 어리는 미소를 보는 기쁨이 크거든요. 그리고 쓰는 동안 상대를 생각하는 시간도 즐겁구요. 그 시간은 온전히 상대의 것이 되는 것 같아요.
  • lovepool 2007/09/12 01:12 # 답글

    이 글을 볼때마다 싱글은 괴롭지 말입니다;;;;^^;;
    어제 88만원 글에 덧글 단것 같은데 오늘 와서 보니 없네요..;; 새벽에 썻는데 잠결에 잘못한듯...;;완전 비몽사몽이였거든요. 덧글 올리기 클릭을 안했나;; 에이궁;;;
  • 쿨짹 2007/09/12 01:28 # 답글

    달콤함에 게으른 연인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저희도 그런 커플인듯...)
    오래된 연인일수록 더욱 더 그 달콤함의 위력을 무시하게 되는 거 같아요. 이쁜 편지 쓰셔야겠네요. :)
  • 수유 2007/09/12 08:58 # 답글

    911과 그녀의 편지의 관계에 대해 살짝 궁금해 했습니다^^
  • sidvicious 2007/09/12 12:07 # 답글

    연초에 오랜 친구에게 카드를 받았는데 그게 어찌나 놀랍고 기뻤는지 몰라요.
    그 맘을 이어가기 위해 주변 친구들에게 카드를 줬더니 그들도 제가 지었던 표정과 비슷한(?) 표정을 짓더군요. 받고 주는 기쁨이란 것을 오랜만에 느껴봤던 것 같아요. 역시 사람의 손길이 들어간 편지를 문자나 메일같은 것으로는 이기지 못하는 것 같아요^^
  • narsha 2007/09/12 15:45 # 답글

    어렸을 때는 편지 정말 많이 썼었어요. 생각해보니 제가 편지를 안 쓰기 시작한 게 핸드폰과 이메일이란게 생기면서부터인 것 같네요. 손으로 편지를 쓰고 받은 게 언제적인지... 친구가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갔을 때 그 때 오랜만에 손편지를 받았었는데 정말 마음이 뭉클했었어요. 애정을 담으며 한글자 한글자 꾹꾹 눌러썼을 친구를 생각하니 그 감동이 배가 되었던 것 같아요. ^^ 저도 이번 가을에는 용기내서 편지 좀 써봐야 겠네요~~ 헤헷

    그나저나 엘리엇님의 사랑 얘기는 언제나 따뜻한 듯. 부럽습니다. ^^
  • 서울하늘 2007/09/13 16:50 # 답글

    아아... 완전 염장 포스팅.? ^^ 두분 다 너무 예뻐 보입니당.
  • Elliott 2007/09/14 09:51 # 답글

    복숭아/ 아. 답장을 받아보지 못하셨다니. 안타까운 기분이에요. 올 가을은 편지로 양방통행 하시길 바래요. ^^
    daydream/ 아기자기한 감수성의 데이드림님이 저는 왠지 부러운 걸요. ㅠ.ㅠ
    lovepool/ 싱글을 의도적으로 겨냥한 포스팅은 아닙니다. 후후. 덧글을 다시 다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
    쿨짹/ 이거 엄청난 부담입니다. 오래된 커플의 타성을 벗어나기가 이런. ;;;
    수유/ 하하. 어떻게 보면 편지 하나로 제게 파문을 남겼으니 테러와도 관련이 있겠군요. 9.11이라. 훗
    sidvicious/그럼요. 사람의 온기가 가득한 편지야 말로 제일이죠. ^^
    narsha/ 그 전에 편지를 나눌 사람부터 만드셔야죠. 흣. 가을이라 뭔가를 시도하기 참 좋은 계절이네요. ^^
    서울하늘/ 염장은 아니고요. 그냥 주저리입니다. ㅎㅎ. 이쁘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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