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저축하는 유일한 방법은 헐렁헐렁하게 사는 겁니다. 생리휴가는 꼭 찾아먹으세요. 월차도 반드시 당겨씁시다. 마감은 한 번씩 어겨주는 센스. 휴가를 반납하고 대신 특별보너스를 받을 생각이 없냐고 상사가 물어오면, 멋있게 뻐큐를 한 번 먹어주세요(손가락 동작은 다들 아시죠?). 기분이 울적한 날에는 무단결근도 한 번씩.
이상 ‘띄엄띄엄 살기 운동본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캐비닛] 김언수, 184p-
당신이 이 저열한 자본주의에서 땀과 굴욕을 지불하면서 힘들고 어렵게 번 돈으로 한 권의 책을 샀는데 그 책이 당신의 마음을 호빵 하나만큼도, 붕어빵 하나만큼도 풍요롭게 맛있게 해주지 못한다면 작가의 귀싸대기를 걷어 올려라. 그리고 멋지게 한마디 해주어라.
“이 자식아, 책 한 권 값이면 삼 인 가족이 맛있는 자장면으로, 게다가 서비스 군만두도 곁들여서, 즐겁게 저녁을 먹는다. 이 썩을 자식아!”
그런데 내가, 겁도 없이, 책을 내게 되었다. 분수도 모르고 덜컥 상까지 받아버려서 이제 빠져나갈 구멍도 없다. 귀싸대기 맞을 각오는 되어 있다.
[캐비닛] 수상소감 中, 391p
-2007년 새해, 내가 맨 처음 읽게 된 소설은 김언수의 ‘캐비닛’이다. 계획상으로는 인터넷으로 책을 구입할 때 같이 사려고 마음에 둔 책인데, 지난 연말에 우연히 서점에 들렀다가 뒤에 적혀 있는 작가의 인터뷰와 수상소감을 읽어보고 충동적으로 사버린 책이다. 사실 나는 지갑에도 돈을 많이 넣고 다니지도 않은 편이고, 충동구매같은 것은 잘 안하는 편이다. 근데 작가의 인터뷰와 수상소감이 내 지갑을 열게 만들었다. 그만큼 작가의 고백에 미려한 힘 같은 게 느껴졌다. 문장의 힘이란 게 이런 걸까. 완고한 소비자의 지갑을 열게 만드는 불가항력 같은. 나는 천 원짜리 다섯 장과 오천 원짜리 한 장만 달랑 있는 지갑을 꺼내 계산을 했다.
위에 잠깐 일부분을 적어 두었지만, 수상소감에서 모종의 자신감 같은 거였다. 보증금을 빼어 밀린 월세와 공과금을 치룬 후, 유랑을 하다가 고시원에 들어가 이 작품 아니면 안된다,는 각오로 쓴 소설이기 때문일까. 그의 수상소감은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운명에 내맡긴 도박사의 배팅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절실함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펼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누가 그랬던가. 말의 힘이 느껴지면 그 때 사람들은 움직이기 시작한다고. 확실히 작가의 사적인 고백들을 통해 나는 말의 힘이 갖는 진정성 같은 게 느껴졌다. 인스턴트와 짝퉁과 가벼움과 시뮬라크라가 둥둥 떠다니는 이 시대에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고색창연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나. 적어도 그의 말 하나, 단어 하나에는 그런 것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꼭 창작을 할 거라 마음먹고 있는 나는, 그의 글을 읽고, 쳇, 난 아직 멀었군,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정말로. 난 아직도 멀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쓰려면. 혹은 쓸 때까지.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소설 정말 좋다. 혹시라도 읽어보실 분들이 있으실까봐 따로 줄거리는 언급하지 않겠다. 만약 읽어보신다면, 꼭 뒤에 있는 작가 인터뷰와 수상소감을 읽고 읽으시라. 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이 작품을 썼는지 미리 알아둔다면 이 소설은 정말 진정으로 읽힌다. 나는 어제 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이 소설을 읽었는데, 완독하는데 대략 여섯 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워낙 소설이 주는 판타지가 강렬하기 때문에 나 같은 경우는 바로바로 넘어가지 못했다. 하여간. 이 소설이 주는 판타지는 당분간 오래갈 듯하다. 어느 작가가 자신은 담배연기처럼 매캐한 소설이 쓰고 싶다고 그랬는데, 이 소설이 딱 그렇다.
캐비닛은 13호 캐비닛을 지키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가 지키고 있는 캐비닛 안에는 기이한 사람들의 파일들이 있다. 이 파일들은 또 하나의 단편처럼 읽힌다. 손끝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사람, 토포러, 타임스키퍼, 네오헤르마프로디토스, 심토머, 도플갱어, 고양이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 등, 13캐비닛 속에 들어 있는 사연들은 우리가 거부하고 냉대를 아끼지 않고, 욕을 하며, 배척하고,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 온갖 타자들의 삶으로 그득하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이야기들은 자본주의에서 정상으로 간주되는 삶의 방식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게 만든다. 결국 이 소설은 세상에는 여러 가지 삶의 방식이 있다, 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럼, 왜 그토록 우리는 잘 살려고 아등바등 하는가. 캐비닛은 새해의 각오와 같은 소설이다. 만약 당신이 아직 새해소망과 계획을 정하지 못했다면, 이 소설을 한 번 읽어보시라.


덧글
복숭아 2007/01/03 13:56 # 답글
수상 소감은 제가 평소에 생각하는 것과도 비슷하군요. 이걸 읽고나니 책이 사고싶어졌습니다. 판타지적 요소가 들어간 소설을 좋아하지 않지만, 기대가 되는군요.
니야 2007/01/03 14:06 # 답글
진정성이 담긴 리뷰의 힘으로 구매 카트에 이 책을 넣었습니다.
ArborDay 2007/01/03 14:15 # 답글
Elliott님이 권하시는 책이라면.
simamoto 2007/01/03 14:22 # 답글
앗!! 잼나겠는데요.^-^
wannacat 2007/01/03 15:42 # 답글
고양이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 부분에서 움찔. (제 별 것 없는 아이디의 뜻과 동일하군요;;) 매캐한 판타지라니, 주저하면서도 보게 될 것 같은 책입니다. :)
서울하늘 2007/01/03 16:33 # 답글
으흐흐흐 살까말까 고민했는데 당장 주문해야겠네요 ㅋㅋ
2007/01/03 20:04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아라 2007/01/03 20:40 # 답글
요즘 읽을책이 쌓여가네요^^;; 영양만점 엘리엇님 이글루~~~저도 조만간 봐야겠어요!
jonaldo 2007/01/03 22:59 # 답글
사진 보니, 선남선녀시네요.얼짱 커플이시구나.
참, 저 한국입니다.
아이비 2007/01/04 00:26 # 답글
포스팅 첫부분 읽을 때 엘리엇님이 쓰신 건 줄 알았네요. 요 몇일 빡빡하고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있던 터라, 조금 느슨해도 좋은가 생각해 보고 있었는데, 책이었네요. 읽어 보겠습니다^^
climber 2007/01/04 07:52 # 답글
소설은 이제 고전을 빼놓고는 읽지 않겠다는 제 결심을 무참히 무너뜨리시는군요. ^^(한때 일본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탓에...ㅋ) 그래도 이런 소설을 괜찮겠지요. ㅎㅎ
2007/01/04 08:27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Elliott 2007/01/04 09:55 # 답글
복숭아/ 네. 읽어보세요. 조만간 복숭아님의 소감을 볼 수 있을 날이 오겠죠. 기대하겠습니다.니야/ 니야님의 독후감 기대합니다.
Arborday/ Arborday님이 권하는 영화라면.
시마모토/넵. 잼있어요. 하하.
와나캣/ 저도 와나캣 님을 잠깐 생각했더랬죠. 후후. 근데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고양이가 되고 싶은 사람의 에피소드는 참 뭉클합니다.
서울하늘/ 망설이지 마세요. 아잣~~!
Elliott 2007/01/04 10:03 # 답글
하치/ 고맙습니다. 댓글 남겨드렸습니다.아라/ '영양만점'하시니까 자꾸 족발이 땡기는데 왜그럴까요. ;; 맛있는 거 먹듯이 '쌓인 책들' 얼릉 헤치우세욧.
jonaldo/ 아닙니다. 사진은 일본 드라마의 한 장면. '선남선녀'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허흑 ㅠ.ㅠ
아이비/ 새해 계획은 느슨하게. 지킬 수 있는 걸로 하나씩. 아시죠?? 하핫
클라이머/ '고전'도 좋지만, 요즘 나오는 소설도 꽤 괜찮은 게 많답니다. '고전'도 아시겠지만 당대의 유행소설이었죠. ^^
비공개/ 넵. 독후감은 꼭 남기시는 센스~~!
2007/01/04 16:16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고장난피아노 2007/01/05 07:56 # 답글
오랜만이죠? 즐겁고 기쁜 새해 되시길...^^
Annis 2007/01/07 11:52 # 답글
좋은 책 추천이 여기저기 쏟아지는군요. 약간 워커홀릭 모드가 되어가는 저에게 브레이크를 걸어줄 지도 모르겠군요 (윽)근데 제가 전에 이미 인사 드렸었던가요?
Elliot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무엇보다 건강하세요~!
Elliott 2007/01/07 14:12 # 답글
비공개/ 괜찮습니다.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는 꼭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장난피아노/ 넵. 잘지내시죠. 호주는 따뜻하죠. 하핫. 새해에는 좋은 일 많이 생겼으면 좋겠네요. ^^
annis/워커홀릭 모드라. 아니됩니다. ;; 릴렉스 하시길 바래요. 감사합니다. 애니스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시는 일 잘 되길 기원할께요 !!
구름코끼리 2007/01/08 10:19 # 답글
안녕하세요? 건너건너 들르게 되었습니다. 저도 좋아하는 바탕체를 쓰시는데 꽂혔어요.(음? 괴상한 이유인가....;;) 저도 이 책 이야기만 들었었는데 한번 봐야겠어요~^^
ekisu 2007/01/10 19:03 # 답글
진짜 올만의 2번째 방문이네여ㅋㅋ 여튼 님의 후기를 보고 구매한 책이 오늘 따끈따끈하게 배송됐네요. 퇴근길에 읽을 생각하니 기대만발~
마리오네뜨 2007/01/14 14:37 # 답글
으아 꼭 읽어보고 싶어요.
Elliott 2007/01/14 15:05 # 답글
구름코끼리/ 그렇군요. 바탕체는 제게는 그냥 익숙해서 그런거랍니다. 특별히 사연이 있는 건 아니고요. 방문 감사합니다.ekisu/ 기쁘시겠어요. 배송된 책을 기대하며 맞이하는 퇴근길이라니. 저도 그런 날이 참 설렙니다.
마리오네뜨/ 마리오네뜨님의 서평이 궁금합니다. 꼭 읽고 서평을.
나무피리 2007/05/01 23:20 # 답글
저도 얼마전 이 책 읽고 감상글 썼어요.정말 좋다, 고 생각이 든 참 오랫만의 글이 아니었나 싶어요.
게다가 이건 그의 첫 글이니, 앞으로도 오래오래 좋은 글 많이 써주면 좋겠다 생각도 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