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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지 사커 (lazy soccer)

2004년이었던가. 유럽축구 선수권 대회, 그러니까 '유로 2004'라고 불렸던 대회가 기억난다. 그 당시 돌풍의 팀은 개최국이자 내가 열렬히 응원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포르투갈'이 아니라, 탄탄한 수비조직으로 무장했던 ‘그리스’였다. 왜아니었겠는가. 체코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의 강호를 격침하고 결승까지 파죽지세로 올라온 그리스 대표팀의 그 난공불락같은 수비는 당대의 유럽축구의 판도를 재편할 정도로 충분했었다. 물론 내 입장에서 그리스 대표팀은 완전히 얍삽한 팀으로 찍혀있었지만, 그리스 대표팀의 수비가 대단하구나, 라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수비를 완성시킨 독일 출신의 레하겔 감독은 그리스 본국에서 아킬레스나 헤라클레스처럼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관람자의 입장에서 그리스 축구를 냉정하게 따져본다면 솔직히 재미있는 축구는 아니었다. 화끈한 공격은 고사하고, 열심히 수비에 매진하다가 상대방 수비에 허점이 보일 경우 의표를 노리는 식이었다. 공격수는 상대방 진영에 저만치 보내고 나머지 선수들을 가지고 수비에 ‘올인’하는 축구. 그 당시 나는 그리스 축구를 '레이지사커', 그러니까 게으른 축구로 명명했다.


이라크와 한국의 축구경기를 보는데 나는 눈앞에서 레이지사커가 부활한 것 같아서 깜짝 놀랐다. 이라크 대표팀의 플레이는 완전히 일단 걸어잠궈식의 '레이지사커'가 아닌가. 하지만 그리스의 그것과는 달리 이라크의 '레이지사커'는 업그레이드가 된 상태였다. 선수 하나하나가 상대방의 몸싸움에도 민감하게 반응했고, 과도한 연기까지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이천수가 태클을 하면 걸려 넘어지는 이라크선수는 이때다 싶을 정도로 잔디에 오랫동안 쓰러져 누워주는, 그러면서 고갈되는 스태미나를 채워주는 식이다. 게다가 상대방의 감정적인 동요도 유발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도 얻는 것이 아닌가. 한 마디로 얄미웠던 것이다. 이라크 축구협회가 레하겔에게 은밀하게 사람들을 보냈는지는 모르지만, 어제 축구 경기는 2년 전의 그 인상적이었던 레이지사커의 귀환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레이지사커를 박살내기 위해선 한 방이 있는 선수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바, 어제 한국 대표팀에게는 이런 킬러본능을 가진 선수가 너무나 아쉬웠다. 정조국의 연속되는 삑사리와 김진규의 허접수비, 어찌됐건 이라크 대표선수들의 얍삽한 행각에 말려 감정조절에 실패한 젊은 선수들. 악동 이천수가 눈물 날 정도로 분전했지만, 축구는 혼자 하는 스포츠가 아니라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줄 뿐이었다. 결과는 1:0 이라크 승리. 대한민국 패배. 대한민국의 허접한 플레이와 이라크의 얍삽한 수비로 요약되는 어제 경기는 오랜만에 코미디 한 편을 본 기분이 들 정도로 즐거웠지만(?), 대한민국의 축구의 고질적인 병폐인 삽질하는 공격수와 물수비의 앙상블을 새삼 확인시켜준 경기여서 안타깝기도 했다. (아니 어떻게 코너킥 숫자가 18개나 됐는데 한 골을 못 넣어~~;;;) 곰가방 감독. 한국에 오면 쓴소리 좀 듣겠구나. 안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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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ott | 2006/12/14 00:44 | dilettante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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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바스티스 at 2006/12/14 04:08
당시 캐나다에서도 이탈리안 친구들과 그리크 친구들하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죠. 기세 등등한 그리크들을 보면서 왠지 좀 흐뭇하기도 했습니다. ^^;;
Commented by 카스테라 at 2006/12/14 09:09
야근을 마치고 집에 가니까 후반 40분. 루즈타임까지 한 10분 봤나요?
물론 새발의 피만 봤겠지만, 재밌었습니다. --;;
고달픈 이라크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다는 데 의의를. 큼!!

...... 그나저나 우리 나라는 레이지사커 하는 팀 만나면 완전 쩔쩔 에휴
Commented by 파인로 at 2006/12/14 10:05
고달픈 이라크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다는 카스테라 님 말씀에 한표. 그런 쪽으로 해석하니 잘 졌다는 생각까지 드네요.
Commented by Elliott at 2006/12/14 12:03
바스티스/ 전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결승전에서 코너킥을 머리로 받아 넣은 델라스의 슛. 밤새서 축구봤는데 멍해지더군요. ;;

카스테라/ 그렇죠.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이라크인들에게 희망을 준 데 손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아마 이란과 결승에서 붙을 것 같은데, 흥미진진해지겠군요. 이란-이라크라. 하여간 2007년 축구계의 화두는 '레이지 사커'가 될 것 같은 기미가..

파인로/ 좋은 게 좋은 거죠. 뭐. 그러나 우리 곰가방 감독만 불쌍하게 생겼습니다. 이거 조기사퇴압력 받는 건 아닌지 원..
Commented by lovepool at 2006/12/14 15:03
그리스가 하던 전략이 쉽게 말해 카운터 어택이였죠. 공격력과 전체적인 면에서 딸리는게 사실이였기에 수비를 먼저, 그리고 빠른 역습. 적은 찬스, 셋트피스에서도 골을 반드시 넣어야 하는 공격이였고 그리스는 성공을 했던 팀이였습니다.
사실 이런 축구를 짠물축구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탈리아 같은 짠물 축구와 다른게 심하게 수비적이라는 건데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나라의 방식과도 흡사합니다.^^;;
선수비 후역습...득점력도 약하고, 양쪽 윙에서 상대 수비를 요리조리 제치는 개인기도 변변치 않은 팀에게 가장 적합한 공격방식이죠. 실제로 가장 득을 본 대회가 2002년 월드컵 때였죠. 우리가 워낙 선수비 후역습 공격을 지향하다 보니 똑같이 우리에게 선수비 후역습을 노리는 팀을 만나면 어쩌면 힘든 경기를 하는건 당연한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상대가 약팀이라지만 수비수를 제껴나갈수있는 개인기는 갖추진 못해 공격자체가 답답할수 밖에 없었던걸로 보입니다. 특히나 패스는 이미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태고;;
우리가 상대의 공격을 차단하고 빠른 역습으로 득점을 올려야되는데 상대가 먼저 수비를 해버리고 되려 공격해오니까요.
근데 이라크는 좀 짜증나긴 했어요...전 무슨 발레단인줄 알았다니까요;;;핸드볼도 그랬지만 정말 발전이 보이지 않는 중동이였습니다.
Commented by sesism at 2006/12/14 17:32
전 엘렷님과 카스테라님의 위닝을 보고 싶어엿. 그런데 오늘 ㅍㅍ도 엘렷님이 아니렷 (저 이거 재미들렸어요! 히히)
Commented by Elliott at 2006/12/15 14:31
lovepool/ 답답한 한국축구는 언제 진전을 보일 수 있을까요. 이란전도 결국 이라크전의 되풀이가 되었더군요. 아 아득하여라~~

sesism// 이거 카스테라님이 수련을 좀 받으셔야 하는데. 하핫. 세시즘님이 한 번 추진해보세요. 세시즘배 위닝 대회. 뭐 이런. (저로 인해 인생의 스트레스가 날아간다면 저도 뿌듯 ;; 이거 얼릉 ㅍㅍ이 되던가 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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