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에서 그 남자가 듣던 노래가 자세하게 어떤 곡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자꾸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여자일 거라는 짐작이 든다. 나라도 남자의 굵직한 목소리를 빌려 추억속의 여인을 떠올릴 것 같지도 않고, 게다가 그 여자의 목소리가 더 애절하고 사무칠수록 추억속의 그녀는 더 가까이 느껴질 것 같다. 그러니까 여자의 목소리와 추억하는 여인의 표상은 한 남자의 마음속에서 어긋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편견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만났던 나보다 윗세대의 분들의 경우는 대개 그랬던 것 같다. 직장에서 만난 상사분들이나 야학하면서 알게 된 초로의 사내들, 같이 공부하면서 알게 된 늦깎이 학생들은 김추자나 양희은이나 주현미나 원미연이나 에디뜨 피아프나 조니 미첼이나 나나 무스꾸리를 통해서 옛사랑을 불러냈다. 그들은 술이 거나하게 취한 뒤 노래방에서 노래를 할 때는 꼭 ‘님은 먼 곳에’를 누락시키지 않았다. 중년의 남자들이 유행 지난 여가수의 노래를 부를 때 느껴지는 감정은 어린 학생들이 SG 워너비나 거북이나 슈퍼주니어를 부를 때와 확실히 다르다. 이쯤 되면 나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서 부를 수 있는 노래 하나 없이 늙어가는 것이야 말로 쓸쓸한 것을 넘어서 불행한 것이구나, 라는 결론에 이른다. 중년의 노래는 확실히 노래하는 자와 멍하니 듣고 있는 자의 경계를 허물 정도로 강력하다.
오늘 귀가하는 길에 탄 버스가 생각난다. 흘끗 일별한 버스기사는 대충 사십 대 초반 정도 돼보였는데, 버스에 오를 때 친절함이 유별났던 것 같다. 버스 안에 승객은 나를 제외하고 서너 명 남짓 될 정도로 한산했다. 버스 안에는 왁스의 노래가 크게 흘러나왔다. 승객이 많이 없어서 그런지 기사분이 크게 의식하는 것 같지 않았다. 노래는 계속 왁스의 노래가 나왔고 기사 분은 노래를 따라 불렀다. 기사의 노래는 뒤편에 자리한 내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지만 불쾌한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버스에서 책방에서 새로 구입한 책을 펴보았는데, 버스 기사의 목소리가 왁스의 목소리만큼 절절한 데가 있어서 독서하는 것은 단념하기로 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나는 그가 분명 추억 속에 그녀를 떠올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설명할 수 없을 테니. 나는 왁스의 노래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많이 감겼다. 버스 기사의 목소리는 내게 익숙한 숫한 중년의 목소리들과 같았다. 버스 기사의 노랫소리에 오랜만에 나도 생각에 잠겼다. 내가 알고 있는 중년의 사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생각해보니 나는 중년의 노래가 없는 것 같다. 그동안 재미없게 살았나. 버스 안에서 들었던 왁스의 노래들이 인상적이어서 집에 들어오자마자 왁스의 노래를 틀었다.


덧글
카스테라 2006/12/12 20:11 # 답글
한 일주일 뜸하시다가 주루루룩, 글들이 올라왔군요.철 드는 건 싫지만, 나이가 들었을 때 그 나이에 걸맞는 무게감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은, 휴우. 저는 어떤 노래로 늙어갈까요-
2006/12/13 04:37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2006/12/13 07:02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Elliott 2006/12/14 00:48 # 답글
카스테라/ 그러니까 열심히좀 오시죠. 하핫. 저는 제대로 부를 줄 아는 노래도 별로 없고, 생각해보니 이러면 안되겠다 싶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철드는 거 너무 힘들어요-비공개/ 반가워요. 조금 있으면 이글루스도 평정을 하시겠군요. 흣
비공개/ 메일로 연락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