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에.., 상념 일기

퇴근을 하려고 하는데 실장이 와서 묻더라. 시간 괜찮으면 삼겹살이나 먹으러 가자고.

나는 내일 직전 보강에 대비해 들어가서 관련 프린트물을 만들어야 하는 '오늘의 할일'이 있었지만 왠일인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마음좋은 사람의 표정을 짓고, 만들어야 할 자료가 있으니 만들면서 기다릴께요, 라고 말해버렸다.

술자리에 실장이 그러더라. 그 선생이랑은 요즘 어떻게 되가요. 궁금해죽겠다는 듯이 과한 관심을 보였는데, 나는 그녀에게 점쟁이의 통찰을 기대했는지 두서없이 요즘 선생 K와의 관계를 풀었다. 찢어진 청바지부터 얼마전 술자리까지.

실장은 말했다. 그 선생이 나를 마음에 두고 있지만 조금은 더 심리전을 펼쳐야 할 거라고.그런데 참 신기하다. 예전에도 그렇고 실장에게 털어놓은 지금도 그녀에 대한 마음이 폭풍처럼 일지가 않는 것이다. 나이를 먹은 건지. 무덤덤 해진 건지. 실장은 상대방에 대한 진심을 어느 정도 알았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안심을 하고 있는 거라고. 정말 그런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무의식이라는 건 절반의 진실이니까.

 

얼마 전에 친구에게 소개팅을 받았다. 1살 연상의 초등교사. 그런데 무덤덤하다. 한 때는 외롭다고 여기저기 좋은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했던 나인데. 근래 들어 했던 몇 번에 소개팅에서 나는 선생K를 떠올렸다. 마음이 심란했다. 죄책감까지는 아닐지라도 그 정도로 마음은 무참했던 것 같다. 도대체 그녀가 뭔데. 최근에 선생 K와 술을 마시는데 그녀가 했던 말이 잊혀 지지 않는다.

"그동안 내가 선생님과 술자리를 피했던 건, 내가 선생님께 밑바닥을 보여줬다는 느낌 때문일 거 에요."

그녀의 말이 절반은 위악이라고 느껴졌던 나는 이상하게 그 한 마디에서 진심 같은 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때 마음이 무너졌던 것일까. 어느 순간 그녀는 내게 강해 보이려고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마치 그게 무슨 소용이냐는 듯이. 하지만 정말일까. 나는 이마저도 위악은 아닐런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실장이랑 술마시다 잠깐 화장실에서 선생 k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돌아오니 실장이 그러더라. 살면서 생각나는 이성이 있다는 건 나이를 먹게 되면 그리 흔치 않은 경험이 돼. 그런데 당신이 그녀의 알콜중독까지, 아니 어두운 모습까지 감당할 수 있다면 머뭇거리지 마.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으니까. 단. 연민은 아니야. 호기심도 아니야. 그러면 오래갈 수 없어.

나도 잘 모르겠다. 연민인지, 호기심인지, 호감이고 또 사랑인지. 아. 내가 방금 사랑이라고 했나. 사랑 따위 잘 모르겠다. 그게 뭔지. 그건 지금으로선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으니까.

  이 글을 쓰는 동안, 방금 선생 K가 전화를 했다. 무슨 일 있냐고. 나는 술 마시다 그냥 전화한 거라고 했다. 그녀는 지금 와인과 맥주를 사들고 집으로 향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왜 혼자 마시냐고 물었다. 단지 혼자 마시는 게 좋을 뿐, 이라고 그녀는 가볍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제도, 어제도 술을 퍼마셨다고 덧붙이더라. 정말 그녀 곁에는 술이 아니면 안되는 것처럼.

  그녀의 문제가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지만, 그녀에 관한 본질에 대해서 더 가까이 갈 수록 어쩌면 나 역시 상처받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하여간 지금은 그저 그녀가 안쓰럽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또 아무렇지 않게 그녀에게 술 한 잔 마시자고 하겠지. 그게 그녀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당신 인생의 이야기. 책읽기

 

  중국계 이민 2세인 테드 창의 중,단편을 엮은 소설집이다. 과학소설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낯선 장르의 소설이었지만 주위의 호평으로 인해 도전해본 책이다. 소설의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나를 감탄하게 만든 것은 작가의 성실성이다. 어떤 작품이든 펼쳐보면 그가 한 편의 소설을 쓰기 위해 많은 책들을 참조했구나, 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특히 <0으로 나누면-Division by zero> 와 <일흔 두 글자-seventy two letters>는 지적으로도 충분히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수학과 물리학을 기반으로 고대신화, 철학, 언어학으로 뻗어가는 작가의 사유는 일종의 기교를 넘어 문장으로 하나의 성채를 축적해가는 그런 느낌이었다.

  책을 읽고 단견이지만 ‘과학소설’에 대한 내 입장을 서술해본다면 대충 이럴 것이다. 소재를 떠나 소설이란 하나의 세계를 보여주는 일이다. 그 세계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자들의 터전인 ‘일상세계’일수도 있고, 과거의 사건을 재조명해서 그것을 현실과 충돌시키는 '변증법적 세계'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학소설이 보여주는 세계란 일종의 ‘가능성의 세계’일지도 모르겠다. 라이프니츠가 말한, 존재하는 무한대의 세계 중 가능한 최선의 세계를 비틀어 그 세계를 제외한 나머지의 세계를 탐색하려는 시도를 보여주는 것이 과학소설의 세계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과학소설은 다분히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다(물론 이건 내가 한 권의 과학소설을 읽고 겨우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이다. 지나친 얘기일수도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과학소설'이란 장르가 '판타지'와 다른 부분이 있다면 세계의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열려져 있다는 점이다. 판타지는 내가 볼 때 신화에 더 친밀하기 때문에 닫힌 세계라고 본다(물론 혹자의 말처럼 과학소설을 근대의 '신화'로 볼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새로운 독서를 시도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테드 창의 이 책을 추천한다. 또 하나의 열린 세계로 들어가는 경험을 한 번 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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